국제외교에서 이런 역설은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직접 서명을 거부하며 협정을 박살낸 인물이, 불과 몇 년 후 그 후속 협정의 가장 핵심적인 당사자로 떠오르는 장면이요. 도널드 트럼프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2018년 이란 핵합의(JCPOA)에서 일방 탈퇴를 선언하며 “역사상 가장 나쁜 협정”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그가, 2025년 재집권 이후에는 이란과의 새로운 핵 협상을 직접 주도하고 나선 것입니다. 2026년 현재, 이란-미국·이스라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이 시점에 왜 이 이슈가 다시 뜨겁게 부상하고 있는지, 그 역설의 전말을 타임라인을 따라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2015년 JCPOA — 수십 년 갈등이 맺은 외교의 열매

nuclear facility uranium centrifuge atomic symb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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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하루이틀 된 이야기가 아닌데요. 팔라비 왕조 시절 시작된 핵 기술 개발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졌고, 2000년대 들어 우라늄 농축 시설의 존재가 국제 사회에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외교 갈등으로 번졌습니다. 2006년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후 10여 년간 이란과 국제 사회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왔죠.

그 긴 갈등의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2015년 포괄적 공동행동계획, 줄여서 JCPOA입니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독일, 이른바 P5+1이 이란과 체결한 이 합의는 간단히 말해 ‘이란이 핵 개발 활동을 대폭 제한하는 대신 서방이 제재를 풀어준다’는 교환 거래였는데요. 이란은 나탄즈, 포르도, 아라크 등 주요 핵시설에서의 활동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감시 아래 엄격히 축소했고, 동결됐던 해외 자산을 되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라늄 농축 순도는 3.67% 이하로, 비축량은 300킬로그램 이하로 묶였죠.

물론 완벽한 합의는 아니었습니다. 이란의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은 합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부 조항에는 일정 기간 이후 자동 만료되는 ‘일몰 기한’이 붙어 있었죠. 비판론자들은 이 허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데, 그 가장 목소리 큰 인물이 바로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될 트럼프였습니다.

2018년, 트럼프가 서명지를 찢어버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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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집권한 트럼프 행정부는 처음부터 JCPOA에 회의적이었는데요. 트럼프는 이 합의가 이란의 핵 능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란의 미사일 프로그램이나 역내 무장 세력 지원 활동은 건드리지도 않는다는 점을 정면 공격했습니다. 제재 해제로 이란에 흘러들어간 자금이 테러 지원에 쓰인다는 논리도 빠지지 않았죠.

결국 2018년 5월, 트럼프는 JCPOA 탈퇴를 전격 선언하고 이란에 대한 ‘최대 압박 캠페인(Maximum Pressure Campaign)’을 가동했습니다. 석유 수출, 금융 거래, 핵심 산업 전반에 걸쳐 강력한 제재가 다시 부과됐는데요. 트럼프의 계산은 명쾌했습니다. 극한의 경제적 압박으로 이란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기존 합의보다 훨씬 유리한 ‘더 좋은 합의(better deal)’를 받아내겠다는 것이었죠.

최대 압박이 낳은 역설적 결과

그런데 결과는 트럼프의 기대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이란은 굴복 대신 강경 대응을 선택했고, 합의에 따라 동결했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오히려 재가동하고 확장해 나갔는데요. 마치 댐을 철거하자 물이 사방으로 쏟아진 격이라고 할까요. JCPOA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현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부터 이란은 농축 순도 한계를 조금씩 넘기기 시작했고, 2021년에는 무기급에 육박하는 60% 농축 우라늄 생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대 압박’이 이란의 핵 능력을 오히려 키우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 셈이죠.

2025년, 위기의 임계점을 넘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에도 JCPOA 복원 협상이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고, 2025년 초 트럼프가 다시 백악관에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이란 핵 위기는 결국 임계점을 넘어섰는데요.

2025년 6월, IAEA 이사회는 2005년 이후 무려 20년 만에 처음으로 이란이 핵비확산조약(NPT) 안전조치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공식 판정을 내렸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6월 13일, 이스라엘이 이란의 군사 지도부·핵 과학자·핵시설을 겨냥한 공습을 개시하면서 역사에 ’12일 전쟁’으로 기록될 분쟁이 시작됐고요. 6월 22일에는 미국이 대형 벙커버스터 폭탄 GBU-57로 이란의 핵시설을 직접 폭격하며 군사적 개입을 공식화했습니다.

이후 국제 사회의 대응도 빠르게 이어졌는데요. 2025년 8월 영국·프랑스·독일이 JCPOA에 내장된 ‘스냅백(snapback)’ 메커니즘을 발동했고, 9월에는 유엔 제재가 전면 복원됐습니다. 10월에는 이란·러시아·중국이 JCPOA가 완전히 종료됐음을 공동 선언하면서 2015년 합의는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죠. 2026년 2월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문제를 명분 중 하나로 삼아 본격적인 이란 전쟁을 개시하기에 이릅니다. 한 번의 탈퇴 결정이 8년에 걸쳐 어떤 도미노를 쓰러뜨렸는지, 타임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입니다.

딜메이커의 역설 — 파괴자가 재건자로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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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ock Staar on Unsplash

트럼프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딜메이커(deal-maker)’입니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인 그는 국제 외교 문제를 협상과 거래의 틀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데요. 그의 논리 안에서 JCPOA 탈퇴는 ‘파괴’가 아니라 더 나은 거래를 위한 ‘레버리지 확보’였습니다. 기존 합의를 무효화하고 극단적인 압박을 가하면, 이란이 결국 더 포괄적인 조건을 수용하며 협상 테이블로 다시 나온다는 계산이었죠. 마치 집을 팔 때 상대가 제시한 첫 가격을 단번에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전략과 비슷한 발상입니다.

문제는 이 논리가 일대일 부동산 협상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수십 년의 역사와 수많은 국가 행위자가 얽힌 중동 핵 문제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는 점입니다. 이란은 굴복 대신 핵 능력 강화를 선택했고, 러시아·중국이라는 든든한 우군 덕분에 최대 압박을 상당 부분 버텨냈습니다. 오히려 이란의 협상 지렛대는 더 높아졌죠. 60% 농축 우라늄을 수백 킬로그램 비축한 상태에서 협상에 임하게 됐으니, 2015년보다 훨씬 강한 패를 쥐게 된 셈이니까요.

새 합의의 가능성과 딜레마

그렇다면 재집권한 트럼프가 이란과의 새 합의를 주도하려 나선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일부 전문가들은 이것을 트럼프 특유의 ‘협상 사이클’로 분석합니다. 상황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뒤 자신이 구원자로 등장하는 패턴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트럼프 1기 때 북한과의 핵 협상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나타난 바 있는데요. 극도의 대립 뒤에 갑자기 정상 회담이라는 ‘빅 딜’로 전환하는 방식 말입니다.

다만 새로운 이란 핵합의가 실제로 성사되려면, 2015년 JCPOA보다 훨씬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합니다. 이란의 핵 능력은 그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됐고, 전쟁이라는 전혀 새로운 변수도 등장했거든요.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격을 경험한 이란이 핵 억지력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반면 트럼프 입장에서는 전쟁 장기화가 외교적·경제적 부담이 되고, 이란이 핵무기를 완성하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출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죠. 이 묘한 딜레마의 교차점에서 새 협상이 잉태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합의를 깬 자가 새 합의를 만든다’는 역설은, 역설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수순일 수 있습니다. 국제외교에서는 때로 문제를 만든 당사자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 열쇠가 올바른 문을 여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트럼프의 이란 핵 딜 행보는 현대 강대국 외교의 불편한 진실을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국제 협정은 종종 ‘규칙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행위자는 자신이 만든 규칙을 깨면서도 새로운 규칙을 설계하는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이죠. 2026년의 이란 위기는 2018년의 선택 하나가 어떤 연쇄 반응을 일으켰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사례이자, 외교적 합의가 얼마나 섬세하게 관리되어야 하는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역설의 주인공이 결국 어떤 ‘딜’을 완성해낼지, 세계는 지금 숨죽여 지켜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