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은 미국이 쐈는데, 맞은 건 한국이었다

naval vessel patrol b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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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4일, 호르무즈 해협 한복판에서 무장한 이란 혁명수비대 병력이 밧줄을 타고 배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표적은 에탄올 약 9만 5천 배럴을 싣고 항해 중이던 한국 국적 유조선 ‘한국케미’였습니다. 승선해 있던 한국인 선원 5명을 포함해 총 20명이 억류됐고, 배는 이란 항구로 끌려갔습니다. 세계 언론이 이 장면을 대서특필하며 공통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하필 한국 배인가?”

이란 당국은 즉각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해당 선박이 해양 환경을 오염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명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습니다. 수긍하는 쪽과, 그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는 쪽.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사건의 진짜 방아쇠는 서울도, 테헤란도 아닌 워싱턴 D.C.에 있었습니다.

시계를 2018년으로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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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뽑아든 경제 무기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임 오바마 행정부가 어렵게 맺어둔 이란 핵합의(JCPOA)에서 전격 탈퇴했습니다. 그리고 이란을 향해 ‘최대 압박’ 제재를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는 국가나 기업은 미국 금융 시스템에서 퇴출시키겠다는 강력한 경고와 함께였습니다. 단순히 두 나라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무기 삼아 전 세계를 향해 “이란 편을 들면 너희도 끝”이라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난처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한국은 당시 이란의 주요 원유 수입국 중 하나였고, 이란과의 교역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 앞에서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였습니다. 미국의 요구를 따르든가, 아니면 달러 거래망에서 고립되든가. 한국 정부는 결국 이란과의 원유 거래를 중단했고, 국내 시중은행에 남아있던 이란의 석유 판매 대금—약 70억 달러(한화로 약 8조 원)—을 동결 계좌에 묶어두게 됩니다.

이란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상황

이란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상상해 보면 꽤 황당합니다. 분명히 정당하게 원유를 팔고 받은 돈인데, 그 돈이 한국 은행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않는 겁니다. 이란이 그 돈으로 뭔가를 사려 해도, 달러 결제가 막히니 계좌는 있지만 쓸 수가 없는 형국이었죠. 마치 내 통장에 돈이 있는데 ATM 비밀번호를 남이 바꿔버린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번호를 바꾼 건 미국이었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건 한국 은행이었습니다.

왜 한국은 돈을 돌려주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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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한국이 그냥 이란 돈을 돌려주면 되지 않았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2차 제재는 “이란에 자금을 이전하는 행위 자체”를 제재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 은행이 이란 계좌로 70억 달러를 보냈다가는, 그 은행은 미국 달러 시스템에서 쫓겨날 수 있었습니다. 국제 무역의 핏줄이 달러인 세상에서 그건 곧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한국은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됐습니다. 미국 눈치를 보자니 이란이 불만을 품고, 이란 요구를 들어주자니 미국 제재에 걸립니다. 한국 정부는 양측을 오가며 외교적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수년째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란의 불만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수가 하나 더 추가됩니다.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입니다. 2020년,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심각한 코로나19 피해국 중 하나였습니다. 방역 물자와 백신 확보가 절박했지만, 동결 자금 때문에 국제 결제가 막혀 있었습니다. 자기 돈이 있는데도 마스크 하나, 의약품 하나 제대로 살 수 없는 상황. 이란 내부의 분노가 어느 방향을 향하게 됐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케미 나포, 우연이 아닌 계산된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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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한 척이 보낸 외교 메시지

전문가들은 한국케미 나포를 단순한 해양 사건이 아닌 ‘외교적 인질극’으로 분석합니다. 이란이 오염 혐의를 내세웠지만,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습니다. 마침 한국 정부 대표단이 동결 자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테헤란 방문을 준비 중이던 시점이었으니까요. 배 한 척을 붙잡음으로써 이란은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간절하고, 또 얼마나 강경하게 나올 수 있는지를 동시에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한국케미 나포 이후 한국 외교부 차관이 직접 테헤란으로 날아갔고, 물밑 협상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선박은 약 3개월 뒤인 2021년 4월에 석방됐습니다. 이란은 목적을 달성했고—적어도 협상을 재개시키는 데에는—한국은 국적 선원들을 무사히 돌려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20명의 선원들은 이유도 모른 채 바다 위 정치 게임의 말이 되어야 했습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직접 맞서지 않는다

이 사건에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공식이 숨어 있습니다. 미국에게 직접 보복하는 건 이란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미국 명령에 따라 자금을 묶고 있는 한국을 압박하는 건 다릅니다. 위험 부담이 훨씬 낮고, 효과는 충분히 낼 수 있습니다. 마치 직장 상사에게 화가 나도 직접 대들기 어려울 때, 그 상사와 사이좋은 동료에게 화풀이하는 것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국가 간의 역학도 결국 그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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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그저 운이 나빴던 걸까

한국케미 사건은 한국이 특별히 뭔가 잘못을 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은 미국의 제재를 성실하게 따랐고, 그 결과로 이란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낸 셈이죠. 미국과 긴밀한 동맹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동 산유국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한국의 지정학적 딜레마가 이 사건 하나에 압축돼 있습니다. 강대국의 결정이 중간 위치의 나라에 어떤 파급 효과를 내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연쇄 충격

우리는 종종 국제 뉴스를 ‘먼 나라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미국과 이란이 싸우면 그건 저쪽 세계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한국케미 사건은 그 착각을 정면으로 깨뜨립니다. 워싱턴의 결정 하나가 서울의 은행 계좌를 얼리고, 테헤란의 분노가 호르무즈 해협 위 한국인 선원들의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나비 날갯짓이 우리 마당의 태풍이 되는 세계,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단순한 ‘배 한 척 나포’가 아닙니다. 달러 패권, 경제 제재, 동맹의 의무, 그리고 그 틈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중간 국가들의 숙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총을 쏜 사람 따로, 맞은 사람 따로인 세계—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한국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이 사건은 조용하고도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