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 코믹스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보통 거창한 꿈을 꿉니다. 세계 정복, 인류 절멸, 우주의 패권 같은 것들이죠. 그런데 마블 코믹스의 악마 ‘메피스토’가 2007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등장해서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피터 파커에게 제안한 건 단 하나, “당신의 결혼을 역사에서 지워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이 기묘한 거래의 진짜 주인공은 코믹스 지면 위의 악마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편집장이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편집 철학이 악마의 얼굴을 빌려 20년짜리 사랑 이야기를 통째로 지워버렸을까요?

악마가 결혼식장에 찾아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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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Amanda Mocci on Unsplash

1987년, 피터 파커는 메리 제인 왓슨과 결혼했습니다. 이건 단순히 코믹스 지면 안의 사건이 아니었어요. 마블은 당시 뉴욕의 셰아 스타디움에서 실제 공개 행사로 두 캐릭터의 결혼식을 열었고, 주요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독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피터 파커와 함께 성장하고, 그의 실패와 상실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이 결혼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꼭 20년이 지난 2007년, 악마가 찾아옵니다. 임무는 세계 정복이 아니라 계약서 한 장이었습니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고모 메이를 살려주는 대가로, 피터와 메리 제인의 결혼을 역사에서 ‘없애버리는’ 거래였죠. 피터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세상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두 사람의 결혼이 지워졌습니다.

왜 ‘이혼’이 아니라 ‘소멸’이었을까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마블은 왜 두 사람을 그냥 이혼시키지 않았을까요? 감정적인 이별, 성장 끝의 결별 같은 방식을 택했다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그런데 마블이 선택한 방법은 ‘처음부터 결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만들기’였어요. 이 이상한 선택의 이유는 코믹스 밖, 편집장의 책상 위에 있었습니다.

편집장의 오래된 꿈 — 조 케사다의 집착

조 케사다(Joe Quesada)는 2000년대 초 마블의 편집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원래 아티스트 출신인 그는 마블이 파산 위기에 몰렸던 시절을 극복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어요. 그런데 편집장이 된 그에게는 오래된 확신 하나가 있었습니다. “피터 파커는 결혼한 상태여서는 안 된다.”

그의 논리는 나름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의 본질은 ‘청춘의 고민과 실패’를 담는 것인데, 결혼을 하고 나면 자동으로 ‘책임감 있는 기혼 남성’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거였어요. 새로 유입되는 10대 독자들이 공감하기 어렵고, 이야기 자체도 경직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결혼이 스파이더맨을 아저씨로 만들고 있다”는 논리였죠.

여러 번 시도하고, 여러 번 막혔다

케사다는 편집장이 된 직후부터 이 결혼을 해소하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어요. 20년 가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본 독자들의 반발이 예상되었고, 무엇보다 설득력 있는 스토리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2007년, 당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집필하던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의 마지막 아크에서 케사다는 직접 개입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꺼내든 카드가 바로 메피스토였죠. 악마를 현실 문제 해결의 도구로 쓴 셈입니다.

작가가 편집장에게 반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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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 약칭 JMS는 당대 최정상급 코믹스 작가였습니다. SF 드라마 《배블론 5》의 창작자이기도 한 그는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수년간 집필하며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어요. 그런 그에게 케사다의 지시가 내려왔을 때, JMS의 반응은 단순한 이의 제기가 아니었습니다.

JMS는 이 스토리라인 자체가 캐릭터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터 파커는 거미에 물린 이후 수십 년간 수많은 상실과 고통을 겪으며 성장한 인물입니다. 첫사랑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 벤 삼촌의 비극, 오랜 경제적 고난. 그 모든 무게를 견뎌온 남자가 ‘악마에게 결혼을 팔았다’는 설정은 그 서사적 축적을 한순간에 가볍게 만드는 행위처럼 보였거든요.

“내 이름을 빼달라”는 전례 없는 요청

JMS는 해당 이슈의 크레딧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외해달라고 공식 요청했습니다. 작가가 자신이 집필한 작품에서 이름을 지워달라고 요구하는 일은 코믹스 역사에서 매우 드문 사건입니다. 결국 이름은 지면에 실렸지만, JMS는 이후 공개 인터뷰와 개인 블로그를 통해 해당 스토리라인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했어요. 작가와 편집부의 갈등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코믹스판 내부 고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브랜드뉴데이 — 새 출발인가, 역주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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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Nicolas HIPPERT on Unsplash

2008년 초, ‘브랜드뉴데이(Brand New Day)’라는 이름을 달고 스파이더맨의 새 챕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독신이 된 피터 파커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새로운 빌런들과 맞서 싸우며, 설레는 연애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마블은 여러 작가가 교대로 집필하는 로테이션 체제를 도입했고, 출판 빈도도 늘렸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산뜻한 리부트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독자들의 반응은 날카롭게 갈렸습니다. 일부는 “이제야 진짜 스파이더맨이 돌아왔다”며 환영했고, 또 다른 일부는 마블 불매 운동을 선언했습니다. 특히 결혼 이후의 피터 파커와 함께 성장한 독자들에게 이건 배신처럼 느껴졌어요. 20년의 감정적 투자가 악마의 계약서 한 장으로 증발해버렸으니까요.

피터와 메리 제인, 그 이후

놀랍게도 브랜드뉴데이 이후에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메리 제인은 계속 등장했고,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긴장은 수년간 암시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마블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결혼 취소 논란을 완전히 봉합하지 못하고 있어요. 일부 대체 우주 스토리에서는 아예 결혼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했고, “언젠가 두 사람은 다시 만나야 한다”는 팬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허구 속 악마는 현실의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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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ános Venczák on Unsplash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스파이더맨의 결혼을 지운 건 메피스토였을까요, 아니면 조 케사다였을까요? 답은 사실 명확합니다. 메피스토는 이야기의 껍데기였고, 결정을 내린 건 편집실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어요. 코믹스 안에서는 악마가 계약서를 들이밀었지만, 코믹스 밖에서는 편집장이 방향을 명령했습니다. 허구 속 악마는 현실의 결정권자를 대신해 등장한 대리인이었던 셈이죠.

이 사건이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논란이 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창작물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현실의 권력 구조를 반영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 수백만 시간 동안 감정을 쏟아 넣은 이야기의 방향이, 한 사람의 편집 철학 하나로 바뀌었습니다. 피터 파커가 악마에게 결혼을 팔았다는 이야기 속에서, 사실 팔린 건 독자들의 20년이었습니다.

케사다의 선택은 틀렸을까?

흥미롭게도, 결과만 놓고 보면 케사다가 완전히 틀렸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브랜드뉴데이 이후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판매 지표는 반등했고, 새로운 작가들이 가져온 신선한 이야기들은 시리즈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게 방법까지 정당화해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목적지에 도달했다 해도, 악마를 빌려 20년짜리 서사를 지운 방식은 여전히 독자들과의 신뢰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 선택이었습니다.

스파이더맨과 메피스토, 그리고 조 케사다. 이 세 이름의 연결고리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창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에 닿습니다. 이야기는 작가가 쓰고, 방향은 편집자가 정하며, 의미는 독자가 채웁니다. 원 모어 데이와 브랜드뉴데이는 그 세 주체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폭발한 사건이었어요. 악마는 어디까지나 지면 위의 존재였지만, 그 악마를 불러낸 손은 현실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의 진짜 대가를 치른 건, 오랫동안 스파이더맨을 사랑해온 평범한 독자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