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다가 심리학 교과서가 떠오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스파이더버스>를 처음 봤을 때, 화면 속 스파이더맨 2099가 내뱉은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건 캐논 이벤트야. 반드시 일어나야 해.”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묘하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영화 속 설정이 아니라, 내 인생 어딘가에서 이미 경험한 감각 같았거든요.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를 기다리며,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들고 심리학 서가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우리 삶에도 캐논 이벤트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멀티버스를 관통하는 공통의 상처 — 캐논 이벤트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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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버스 시리즈가 던진 가장 도발적인 아이디어는 바로 이것입니다. 수천 개의 평행 우주에 수천 명의 스파이더맨이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사건들이 있다는 것. 방사능 거미에 물리는 것, 가까운 누군가를 지키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며 살아가는 것. 이 사건들을 건너뛰거나 막아버리면, 그 우주의 스파이더맨은 진정한 영웅이 되지 못한다는 논리입니다. 영화는 이것을 ‘캐논 이벤트’라고 부릅니다.

주인공 마일스 모랄레스는 이 논리에 정면으로 반발합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야 한다는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요. 우리는 영화관에서 그의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스파이더맨 2099의 냉혹한 주장이 어쩐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리고 그게 무섭습니다. 이 불편한 설득력이 어디서 오는 건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제로 이 캐논 이벤트 개념은 단순한 서사 장치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형성 원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웅이 되려면, 단지 능력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특정한 균열, 특정한 상실, 특정한 선택의 기로를 지나쳐야만 비로소 그 사람이 ‘완성’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심리학은 이 픽션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지지하는 연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수십 년간 연구해온 바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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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심리학자 리처드 테데스키와 로런스 캘훈은 오랫동안 심리학계가 외면해온 현상을 정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트라우마 이후 사람들이 단순히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강하고 깊은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현상에 그들이 붙인 이름이 바로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입니다. 이게 캐논 이벤트와 무슨 관계냐고요? 잠깐만요, 핵심이 나옵니다.

외상 후 성장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가장 크게 성장하는 순간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세계관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 즉 자신이 구축해온 삶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심각한 질병을 진단받거나, 오랫동안 믿어온 관계가 산산조각 나는 것. 이런 사건들이 오히려 성장의 방아쇠가 된다는 겁니다. 마치 스파이더맨이 거미에 물린 후에야 능력을 얻듯이 말이죠.

더 흥미로운 것은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이론입니다. 에릭슨은 인간의 심리 발달이 특정 ‘위기’를 통해 단계별로 진행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위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위기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삶이 설계해놓은 일종의 관문입니다. 그리고 그 관문을 피해 우회하려 할수록, 오히려 심리적 발달이 멈춰버린다는 것이 에릭슨의 핵심 주장입니다. 피하려다 더 깊이 빠진다는, 그 역설.

당신의 삶에도 ‘정해진 순간’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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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잠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세요.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준 결정적인 순간이 있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순간은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사건인 경우가 많습니다. 실연, 실패, 이별, 상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바로 그 사건들이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한 변곡점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전환점(Turning Point)’ 또는 ‘분기점(Inflection Point)’이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을 깊이 연구한 댄 매캐덤스 교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로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방식의 연구를 수십 년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흥미로운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심리적으로 성숙하고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고통에서 의미를 찾는 서사 구조’가 뚜렷하게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에 부여하는 의미가 인생의 궤도를 바꾼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파이더버스와의 평행선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마일스 모랄레스가 다른 스파이더맨들과 다른 점은 능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캐논 이벤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저항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가 단순한 슈퍼히어로 오락을 넘어서는 이유입니다.

반전 — 운명론의 함정, 그리고 선택의 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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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amie Street on Unsplash

자, 여기서 주의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캐논 이벤트 이론과 외상 후 성장 이론, 이 두 가지를 함께 읽으면 자칫 위험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여라” 또는 “지금 힘든 것도 결국엔 다 의미가 있을 거야”라는 식의 손쉬운 위로 말이죠. 하지만 심리학 연구들은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한 이야기를 합니다.

외상 후 성장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더 깊은 상처만 남습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에 자신과 주변에 어떤 서사를 형성하는가입니다. 지지적인 관계, 의미를 탐색하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이 나를 완전히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주체성의 감각이 핵심입니다. 즉, 캐논 이벤트가 일어나더라도,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여전히 내가 쓴다는 것이죠.

마일스가 스파이더맨 2099의 논리에 맞서 싸우는 것이 단순한 반항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사건이 일어나느냐 마느냐를 두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그 사건이 자신과 아버지를 어떻게 규정할지, 그 이야기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두고 싸우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싸움이야말로, 심리학이 수십 년간 연구해온 진짜 영웅적 행위입니다. 시스템이 정해준 서사를 거부하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일.

우리는 각자의 스파이더버스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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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Lan Gao on Unsplash

지금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을 지나고 있다면, 혹은 과거의 어떤 순간이 여전히 당신을 붙잡고 있다면, 이 질문을 한 번 던져보세요. 이 사건이 내 인생의 캐논 이벤트라면,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써나가고 싶은가? 피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다면, 그 이후의 선택은 분명히 내 것입니다.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가 마일스의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캐릭터가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맞서는가에서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