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에는 안 오셨나요?” — 이 질문이 2025년 일본 언론과 재계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AI 반도체의 절대 권좌에 오른 NVIDIA의 젠슨 황 CEO가 아시아 주요국을 잇따라 방문하면서도 유독 일본만큼은 일정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단순한 출장 스케줄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빈칸’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 이슈의 배경과 맥락을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 ‘일본 패싱’의 뿌리를 짚다
사실 ‘일본 패싱(Japan Passing)’이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닌데요. 1990년대 후반, 미국 외교관들이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도쿄를 건너뛰기 시작하면서 이 단어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경제 침체의 수렁에 빠져 있었고, 미국의 눈은 급격히 부상하는 중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이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던 그 쓸쓸한 풍경,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리고 지금, 약 30년이 지난 AI의 시대에 유사한 풍경이 재연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엔 외교가 아닌 테크 비즈니스의 영역에서입니다. 젠슨 황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곧 AI 패권의 축을 의미하는 시대가 됐고, 일본은 그 지도에서 다시 한번 공백으로 남겨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역사가 교훈이 된다면, 일본으로선 이 ‘빈칸’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지금 ‘반도체 부활’을 국가 아젠다로 삼고 수십조 원을 쏟아붓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젠슨 황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 역설이 바로 오늘 우리가 풀어야 할 핵심 질문입니다.
젠슨 황의 아시아 순방 — 지도에서 일본만 빠졌다
젠슨 황의 아시아 행보를 지도 위에 그려보면 그 패턴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대만을 찾아 TSMC 수뇌부와 머리를 맞댔고, 한국에서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경영진과 AI 메모리 협력을 논의했습니다. 중국 방문에서는 현지 빅테크 기업들과 AI 칩 공급 관련 회동을 가졌는데요. 이 세 곳은 NVIDIA의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파트너들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NVIDIA의 AI 칩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역추적하면 답이 나옵니다. 칩 자체는 대만 TSMC가 만들고, 그 칩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이 공급합니다. 그리고 그 칩을 가장 대규모로 사들이는 시장 중 하나가 중국이었습니다. 이 세 꼭짓점이 이루는 삼각형 안에 NVIDIA의 핵심 이익이 집중돼 있는 것이죠. 일본은, 아직 그 삼각형 안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젠슨 황의 동선은 감정이 아닌 비즈니스 중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가 직접 날아가 만나는 상대는 NVIDIA의 수익 구조와 공급망에 직결된 파트너들입니다. 일본이 그 목록에 없다는 것은, 현재 일본이 NVIDIA의 공급망과 시장 방정식에서 아직 결정적인 변수가 되지 못했다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일본의 반도체 야망 — 화려한 청사진과 냉혹한 현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은 반도체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 상징이 바로 라피더스(Rapidus)인데요. 일본 정부가 주도하고 도요타·소니·NTT 등 국내 대기업들이 참여한 이 컨소시엄은 2027년까지 2나노미터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또한 TSMC가 구마모토에 공장을 열면서 일본의 반도체 생산 기반도 조금씩 갖춰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반도체를 ‘만드는 것’과 AI 생태계의 ‘핵심 플레이어’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인데요. 라피더스의 2나노 양산 계획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도전이고, TSMC 구마모토 공장은 첨단 공정이 아닌 비교적 성숙한 공정을 담당합니다. AI 가속기의 심장부인 최전단 파운드리 기술에서 일본은 여전히 TSMC, 삼성과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AI 소프트웨어·서비스 생태계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구글·메타, 중국의 바이두·알리바바가 AI 인프라에 천문학적 규모의 GPU를 주문하는 것과 달리, 일본 기업들의 AI 투자 규모와 속도는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지만, 정작 그 반도체를 가장 많이 써줄 AI 고객사 생태계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셈입니다.
친절한 무시인가, 전략적 압박인가 — 두 가지 해석
자, 이쯤에서 본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젠슨 황이 일본에 가지 않은 것,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충돌합니다.
첫 번째는 ‘친절한 무시’론입니다. 젠슨 황은 그저 비즈니스 우선순위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고, 일본은 아직 그 우선순위 목록 상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죠.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무시’는 적대감보다 더 무섭습니다. 적이라면 대응이라도 할 수 있지만, 안중에 없는 존재라면 협상 테이블 자체가 열리지 않으니까요. 마치 식당에서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랄까요.
두 번째는 ‘전략적 압박’론입니다. NVIDIA가 의도적으로 일본을 건너뜀으로써 “당신들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도 우선순위를 높여줄 이유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해석인데요. 이 논리에 따르면, 일본이 AI 인프라 투자를 더 과감하게 늘리고, NVIDIA 칩을 대규모로 구매하고, 실질적인 파트너십을 제안한다면 젠슨 황의 방문 일정도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이라는 겁니다. 흥미롭게도,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오히려 미국으로 날아가 젠슨 황을 직접 만나며 수백억 달러 규모의 AI 투자를 선언했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직접 찾아가야 했던 상황, 이것 자체가 현재 두 플레이어의 역학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해석이 사실 동전의 양면이라고 봅니다. ‘지금 당장은 우선순위가 아니다(친절한 무시)’이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더 강하게 구애하라(잠재적 압박)’는 메시지가 동시에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NVIDIA에게 일본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일본이 해야 할 일
그렇다면 일본은 무조건 불리한 위치에만 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AI 반도체 생태계에서 NVIDIA가 탐낼 만한 자산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서 일본의 위치는 독보적입니다. 반도체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전 세계 공급의 90% 가까이를 일본 기업이 책임지고 있고,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에서도 도쿄일렉트론(TEL)을 비롯한 일본 기업들의 점유율이 절대적이거든요. NVIDIA가 장기적 공급망 안정성을 고민한다면, 일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숨은 고리’입니다.
둘째로, 일본은 AI가 실제로 침투할 수 있는 거대한 내수 시장과 산업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제조업, 의료, 물류, 로보틱스 — 이 모든 분야에서 AI 전환이 본격화된다면, 그것은 곧 엄청난 GPU 수요로 이어집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디지털 전환(DX)’과 AI 국가전략은 이러한 수요를 폭발적으로 키울 잠재력이 있습니다. 젠슨 황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일본의 숙제는 분명합니다.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넘어, AI 칩의 주요 소비 주체이자 생태계의 실질적 파트너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죠. 라피더스의 양산 성공,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투자, 그리고 구체적인 NVIDIA 협력 프로젝트 — 이런 것들이 가시화될 때, 비로소 젠슨 황의 비행기 목적지 목록에 ‘도쿄’가 추가될 것입니다.
마무리 — 이 이슈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젠슨 황 일본 패싱’ 논란은 사실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AI 패권이 재편되는 이 시대에, 어떤 나라·기업·산업이 그 생태계의 중심부에 서게 될 것인가를 묻는 거대한 질문의 축소판이기 때문인데요. 젠슨 황의 발걸음은 냉정하게도 현재의 기술 지형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가 어디를 가느냐는, 곧 AI 시대의 판도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입니다.
일본이 이 ‘빈칸’을 메우려면 선언이 아닌 실행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이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있습니다. AI 반도체 생태계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투자와 의지가 있어도 글로벌 플레이어의 방문 목록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것. 테크 패권 경쟁은 의지와 자본만으로 이길 수 없고, 생태계 안에서의 실질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작은 ‘패싱’ 논란이 날카롭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