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젠슨 황이 10년 넘게 전 세계 개발자들에게 나눠준 것일 겁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풀었고, 누구도 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한때 3조 달러를 넘어섰고, 그 핵심 이유를 짚어보면 결국 그 ‘공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일까요? 공짜로 주면 돈을 잃는 게 상식인데, 젠슨 황은 왜 반대의 결과를 얻었을까요?
GPU는 원래 게임기용 부품이었다 — 그런데 젠슨 황은 다른 곳을 봤다
2006년, 엔비디아가 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라는 플랫폼을 처음 세상에 내놨을 때 업계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당시 GPU는 3D 게임 그래픽을 빠르게 뿌려주는 부품이었고, 그게 전부라고 여겼죠. 그런데 젠슨 황은 달랐습니다. 그는 GPU의 수천 개 코어가 동시에 연산을 처리하는 구조에서 게임이 아닌 다른 미래를 읽었습니다. 바로 과학 계산, 물리 시뮬레이션, 그리고 아직 이름조차 생소하던 ‘딥러닝’이었습니다.
CUDA는 개발자들이 GPU를 게임 이외의 목적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언어이자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젠슨 황은 CUDA를 공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딸려오는 수많은 수학 라이브러리와 개발 도구까지 무료로 풀었습니다. 대학 연구실이든, 스타트업이든, 개인 개발자든 — 돈 한 푼 없이 GPU 병렬 연산 세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냥 좋은 회사처럼 보이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순수한 선의가 아니었습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씨앗 뿌리기였습니다.
당시 경쟁자들은 비웃었습니다. “공짜로 툴을 뿌려봤자 하드웨어를 안 사면 그만”이라고 했죠.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결정적인 맹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CUDA를 배우기 시작하면, 그 지식은 다른 곳으로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쟁자들은 미처 몰랐던 겁니다.
행렬 곱셈이 세상을 지배한다 — cuBLAS라는 보이지 않는 심장
딥러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들여다보면, 결국 모든 것이 행렬 곱셈으로 귀결됩니다. 이미지를 인식하든, 언어를 이해하든, 추천 알고리즘이 돌아가든 — 그 계산의 99%는 수억 번의 행렬 곱셈입니다. 그리고 이 행렬 곱셈을 빠르게 처리하는 표준 규격이 바로 BLAS(Basic Linear Algebra Subprograms)입니다. 1979년 포트란으로 시작된 이 수학 라이브러리 규격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과학 계산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엔비디아는 여기서 핵심 수를 뒀습니다. GPU에 최적화된 BLAS 구현체인 cuBLAS를 만들었고, 이것 역시 CUDA 생태계의 일부로 무료 제공했습니다. 개발자들이 PyTorch나 TensorFlow 같은 딥러닝 프레임워크를 실행하면, 내부에서는 cuBLAS가 행렬 곱셈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사용자는 이걸 의식조차 못합니다. 그냥 코드를 짜면, 자연스럽게 엔비디아의 최적화 엔진 위에서 돌아가는 구조가 된 겁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젠슨 황은 도시 전체의 하수도와 전기 인프라를 무료로 깔아줬습니다. 처음엔 그냥 편리하다고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도시 전체의 건물이 그 인프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구조가 돼버린 겁니다. 인프라를 만든 사람이 결국 도시의 진짜 주인이 되는 것처럼요.
10년의 무료 전략 — 사실은 ‘전환 비용’을 쌓는 작업이었다
경제학에서 ‘전환 비용(Switching Cost)’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 번 어떤 제품이나 시스템에 익숙해지면, 다른 것으로 갈아타는 데 드는 시간, 돈, 노력이 너무 커져서 쉽사리 바꾸지 못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카카오톡을 쓰던 사람이 다른 메신저로 이동하기 어려운 것, 특정 운영체제에 맞춰진 소프트웨어들이 다른 OS로 못 넘어가는 것이 같은 원리입니다.
CUDA가 바로 이 함정을 AI 생태계 전체에 설치했습니다. 2010년대 초, 딥러닝 붐이 일어났을 때 연구자들은 대부분 CUDA로 코드를 짰습니다. 공짜였고, 빠르고, 자료가 넘쳤으니까요. 논문이 CUDA 기반으로 작성됐고, 그 논문을 재현하려면 CUDA가 필요했으며, 그 코드를 인용한 다음 논문도 CUDA 위에서 돌아갔습니다. 이 사이클이 10년 넘게 반복되자, AI 연구 세계 전체가 CUDA를 중력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놀랍게도, 이 시기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에서 돈을 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드웨어, 즉 GPU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CUDA라는 공짜 생태계가 AI 연구자들을 엔비디아 GPU로 끌어들였고, 그 GPU는 점점 더 비싸지고 더 많이 팔렸습니다. 무료 소프트웨어가 유료 하드웨어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키운 역설이 완성된 겁니다.
AMD도, 인텔도 넘지 못하는 벽 — 해자(Moat)의 정체
워런 버핏이 자주 쓰는 표현 중 ‘해자(Moat)’가 있습니다. 성 주변을 둘러싼 물길처럼, 경쟁자가 쉽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경쟁 우위를 뜻합니다. 엔비디아의 해자는 칩 설계 능력이 아닙니다. 실제 해자는 CUDA 생태계, 즉 10년간 무료로 쌓아온 개발자들의 습관과 지식과 코드베이스입니다.
AMD는 ROCm이라는 대안 플랫폼을 내놨고, 인텔도 oneAPI를 밀었습니다. 하드웨어 성능만 놓고 보면 엔비디아를 위협할 수준까지 올라온 경쟁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의 개발자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PyTorch 코드를 AMD GPU에서 돌리려면 코드를 손봐야 하고, 최적화된 라이브러리들이 CUDA 기준으로 짜여 있어서 호환성이 들쭉날쭉하며, 무엇보다 구글에 문제를 검색하면 CUDA 기반 해결책만 수백만 개가 쏟아집니다. 갈아탄다는 건 단순히 장비를 바꾸는 게 아니라 지식과 자료와 커뮤니티 전체를 갈아엎는 일이 됩니다.
이게 바로 젠슨 황이 10년의 ‘손해’를 감수하며 만들어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벽. 돈으로 살 수 없고, 하루아침에 쌓을 수도 없는 종류의 해자입니다. 수백조 원짜리 시가총액의 진짜 근거는 칩 공장이 아니라, 개발자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린 CUDA라는 언어입니다.
공짜가 가장 비싼 전략이 되는 순간 — 젠슨 황의 역설이 주는 교훈
젠슨 황의 CUDA 전략은 우리에게 낯선 논리를 보여줍니다. 가치 있는 것을 공짜로 나눠줄수록,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돌아오는 세계. 물론 모든 공짜 전략이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엔 중요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 무료로 푼 것이 ‘진짜 유용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CUDA와 cuBLAS는 연구자들에게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성능 이득을 줬습니다. 둘째, 무료 생태계를 오래 유지할 체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엔비디아는 GPU 하드웨어 판매로 충분한 수익을 내면서 소프트웨어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타이밍이 맞아야 했습니다. 딥러닝이라는 파도가 오기 직전에 파도타기 보드를 무료로 나눠준 셈이었습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공짜’는 흔히 덤핑이나 손실 마케팅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젠슨 황의 이야기는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공짜 전략은 시장을 키우는 것, 그리고 그 시장이 커지는 방향이 자신의 하드웨어를 향하도록 설계하는 것입니다. 강물의 흐름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이죠. 물길이 바뀌면 물고기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젠슨 황은 AI라는 강의 흐름 자체를 엔비디아 쪽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투자는 ‘내가 받을 것’을 계산하기 전에 ‘남에게 줄 것’을 먼저 설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10년간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젠슨 황은, 사실 그 10년 내내 전 세계 AI 생태계의 기초 공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공사가 끝난 자리에 남은 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수백조 원짜리 성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