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말, 전 세계 코믹스 팬들 사이에 전례 없는 논란이 터졌어요. 스파이더맨 — 그 거미줄 치는 우리의 피터 파커가 — 악마에게 자신의 결혼을 통째로 팔아버렸거든요. 20년 넘게 이어온 메리 제인 왓슨과의 사랑을, 악마 메피스토의 손에 넘겨버렸다고 해요. 믿기 어렵죠? 그런데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어요. 이 황당한 전개의 진짜 배후는 메피스토도, 빌런도 아닌 — 마블의 편집장 한 사람의 오랜 개인적 집착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스파이더맨, 악마의 손을 잡다 — “원 모어 데이”의 충격
2007년 10월부터 12월까지 연재된 “원 모어 데이(One More Day)”는 마블 코믹스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스토리라인 중 하나로 지금도 회자돼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저격을 당해 죽어가는 메이 숙모를 살리기 위해 피터 파커가 악마 메피스토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는데, 메피스토가 요구한 대가가 충격적이었어요. 바로 피터와 메리 제인의 ‘결혼’이었거든요. 사랑의 기억, 함께한 세월, 그 모든 것을 지우는 대신 숙모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거래였죠.
1987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애뉴얼 21호에서 올린 결혼식은 당시 무려 250만 부가 팔리며 TV 뉴스에도 보도된 세기의 이벤트였어요. 슈퍼히어로 코믹스 역사상 손꼽히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는데, 그게 한 컷의 마법으로 없던 일이 되어버린 거예요. 메피스토가 손가락을 튕기자, 피터 파커는 결혼한 적 없는 싱글 청년으로 되돌아갔어요. 독자 입장에서는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감독이 갑자기 스크린을 찢어버린 것 같은 충격이었다고 해요.
이어지는 “브랜드 뉴 데이(Brand New Day)” 아크에서 피터 파커는 완전히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게 돼요. 허름한 아파트, 만성 재정난, 새롭게 등장하는 연인들 — 전형적인 ‘고달픈 청년 피터’의 모습으로요. 마블은 이것을 “스파이더맨의 원점 회귀”라고 홍보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대체 누가, 그리고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그 답은 편집실 안에 있었습니다.
악당은 메피스토가 아니었다 — 편집장의 13년 집착
“결혼이 스파이더맨을 망쳤다” — 한 편집장의 오랜 신념
마블의 편집장 조 퀘사다(Joe Quesada)가 2000년에 취임했을 때, 그에게는 이미 확고한 신념 하나가 있었다고 해요. “스파이더맨은 결혼해선 안 됐다”는 것이었죠. 그는 피터 파커가 메리 제인과 결혼한 이후 캐릭터가 너무 ‘안정된 어른’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어요. 집세 걱정하고, 실연당하고, 모든 게 엉망인 ‘보통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희석되어버렸다는 거였죠. 독자들이 공감하는 건 화목한 가정이 아니라, 엉망진창 삶을 버텨내는 청년이라고 봤던 거예요.
퀘사다는 이 생각을 인터뷰에서 숨기지 않았어요. “스파이더맨의 결혼은 캐릭터에게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을 정도니까요. 그는 편집장이 된 순간부터 결혼을 없애는 방법을 탐색했다고 해요. 이혼? 너무 막장 드라마 같다. 메리 제인의 사망? 팬들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온 묘수가 ‘악마와의 거래로 역사 자체를 지우는 것’이었던 거예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영리한 발상인데, 동시에 굉장히 무서운 발상이기도 하죠.
더 놀라운 건, 퀘사다가 “원 모어 데이”의 연필 작화를 직접 담당했다는 사실이에요. 편집장이 원고 검토도 모자라 그림까지 손수 그렸다는 건,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업무 결정이 아니라 개인적 사명에 가까웠다는 뜻이에요. 마블의 간판 히어로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바꾸겠다는 강렬한 의지 — 어떻게 보면 그것 자체가 집착이라는 이름에 딱 맞는 모습이 아닐까요?
작가조차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 JMS의 분노
“원 모어 데이”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작가는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J. Michael Straczynski), 팬들 사이에서는 JMS라고 불리는 분이에요. SF 드라마 ‘바빌론 5’의 창작자이기도 한 그는, 2001년부터 스파이더맨 코믹스를 맡아 오랜 팬들의 사랑을 받던 베테랑 작가였어요. 그런데 이 결말에 대해 그는 조용히 수긍하지 않았어요. “나는 이 스토리를 이런 방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거든요.
심지어 JMS는 마지막 두 이슈에서 자신의 이름을 크레딧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고 해요. 이건 정말 극단적인 거부 의사 표현이에요. 요리사가 “이 요리는 제 작품이 아닙니다”라며 서빙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보면 돼요. 결국 이름은 크레딧에 남겨졌지만, 이 사건은 편집 권력과 창작자 사이의 충돌이 얼마나 첨예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어요.
JMS는 이후 인터뷰에서 “이혼이나 메리 제인이 기억을 잃는 방식, 또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방향을 여러 차례 제안했다”고 밝혔어요. 악마와 결혼을 거래하는 설정은 스파이더맨의 본질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죠. 스파이더맨 캐릭터의 핵심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정신인데, 악마와 거래해 책임을 회피한다는 건 모순 그 자체라는 거였어요. 퀘사다는 이 모든 반대 의견을 압도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브랜드 뉴 데이, 팬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브랜드 뉴 데이”는 2008년부터 시작된 스파이더맨의 새로운 챕터예요. 마블은 이 리런치를 위해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어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격주 발행에서 매주 발행으로 전환한 거예요. 세 명의 작가가 로테이션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는 방식이었죠. 그만큼 마블이 이 새 출발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느껴지는 부분이에요. 편집장의 오랜 꿈이 마침내 실현된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독자들의 반응은 딱 반으로 갈렸어요. 일부 팬들은 “활기차고 읽기 쉬워졌다”며 환영했지만, 훨씬 더 많은 팬들이 “원 모어 데이”를 코믹스 역사상 최악의 스토리로 꼽으며 분노를 쏟아냈어요. 커뮤니티에서는 ‘OMD(One More Day)’를 ‘One More Disaster(또 하나의 재앙)’라고 비틀어 부르는 밈이 순식간에 퍼졌을 정도였으니까요. 마블 공식 게시판에도 항의 글이 폭주했고, 일부 팬들은 불매 선언까지 했어요.
가장 아이러니한 건, 퀘사다가 그토록 원하던 ‘공감 가는 싱글 피터 파커’가 정작 기존만큼의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20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피터와 MJ의 감정적 무게감이 사라지면서 이야기가 오히려 가벼워졌다는 평가가 쏟아졌어요. 결국 마블은 수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의 관계를 조금씩 복원하는 방향으로 방향타를 틀게 됩니다. 13년의 집착이 만들어낸 변화를, 또 다른 시간이 되돌리고 있는 셈이에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탄생 배경을 알고 나면, 코믹스를 읽는 시선이 조금 달라지지 않나요? 히어로의 운명은 빌런이 아니라, 편집실의 신념 한 줄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는 사실. 조 퀘사다의 집착이 옳았는지 그르렸는지에 대한 정답은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논쟁 중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 스파이더맨의 역사에서 이 사건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 어쩌면 그게 메피스토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