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돌이었습니다.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놓인 하얀 돌 하나가, 수천만 번의 연산을 거듭하던 인공지능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2016년 3월 13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 대국장에서 벌어진 이 순간은 인류가 AI에게 처음으로 ‘진짜 허점’을 발견한 역사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세돌 9단이 78번째 수를 두는 그 찰나, 중계를 보던 바둑 전문가들은 일제히 숨을 멈췄고, 구글 딥마인드의 개발자들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인간 대 기계, 세기의 바둑 대결

game board competition s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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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알린 건 2015년이었어요. 유럽 바둑 챔피언 판 후이(Fan Hui)를 5대 0으로 완파하면서 AI가 바둑에서도 인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죠. 하지만 바둑계는 반신반의했습니다. 판 후이는 세계 최정상급이 아니었거든요. 진짜 시험대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정상급 기사이자 18번의 세계 대회 우승 경력을 보유한 이세돌 9단이었어요.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는 이세돌에게 5번의 대결을 제안했습니다. 상금만 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3억 원이었어요. 많은 전문가들은 이세돌의 완승을 예상했습니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우주의 원자 개수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복잡한 게임이었으니까요. 체스를 정복한 AI도 바둑 앞에선 무릎을 꿇을 거라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습니다. 믿기 어렵죠?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어요. 알파고가 첫 세 경기를 내리 가져갔거든요.

이세돌은 몰리고 있었습니다. 세 번의 패배로 시리즈는 이미 알파고의 승리로 굳어지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네 번째 경기, 78번째 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날이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78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 한 수

board strategy stone pie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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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어깨짚기’라는 수법이 있습니다. 상대 돌의 어깨 부근에 내 돌을 바짝 붙이는 기법이에요. 공격적이면서도 유연한, 고단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고급 전술입니다. 이세돌이 78번째 수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어깨짚기였어요. 평범한 어깨짚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그 타이밍에, 그 위치에 돌을 놓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기가 막힌 한 수였죠.

알파고는 그 전까지 이 수가 나올 확률을 어떻게 계산했을까요? 딥마인드 연구팀의 설명에 따르면, 알파고는 해당 위치에 인간이 돌을 놓을 가능성을 무려 1만 분의 1 이하로 봤다고 해요. 쉽게 말해 “설마 거기에 두겠어?”라고 판단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수에 대한 방어 시나리오가 사실상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0,000번 중 9,999번은 인간이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니까요.

그 순간 중계를 맡고 있던 해설가들조차 “이건 무슨 수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프로 기사들도 당황할 만큼 창의적이고 비직관적인 수였어요. 이세돌은 훗날 “평생 두었던 수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고 감동적인 한 수”라고 회상했답니다. 수십 년의 바둑 인생을 통틀어 단 하나의 수를 꼽은 거예요.

AI가 멈춰버린 10분 — 알파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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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번째 수가 놓이는 순간, 알파고의 내부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승리 확률을 실시간으로 계산하는 핵심 모듈이 갑자기 방향을 잃었거든요. 경기 직전까지 70% 이상을 유지하던 알파고의 예상 승률이 순식간에 50% 아래로 곤두박질쳤습니다. AI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갑자기 지도가 사라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어요.

더 충격적인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알파고가 78수에 대응하며 두기 시작한 수들은, 바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한 허술한 수들이었습니다. 딥마인드의 대리 기사로 실제 돌을 놓던 황아자(Aja Huang)는 태블릿을 연신 들여다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어요. 알파고가 지시하는 수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거죠. AI가 마치 포기한 것처럼 전혀 엉뚱한 자리에 돌을 놓기 시작했거든요.

기술적으로 설명하자면, 알파고의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Monte Carlo Tree Search)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거예요. 이 알고리즘은 수백만 가지의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며 최선의 수를 골라내는데, 78수라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자 계산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겁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을 만나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를 무한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죠. 그 재탐색이 무려 10여 분에 걸쳐 이어졌고, 그 사이 알파고의 수들은 점점 더 이상해졌습니다.

왜 78수는 그토록 치명적이었나?

neural network circuit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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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의 핵심 학습 방식은 수천만 건의 기보(바둑 경기 기록)를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최고수들이 역사적으로 두어온 수들의 패턴을 익히고, 그 중 가장 승률 높은 선택을 반복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78번째 해당 위치에 돌을 두는 경우는, 그 방대한 기보 데이터 어디에서도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어요. 데이터가 없으면, AI는 길을 잃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있어요. 알파고는 ‘인간보다 더 잘 두는 법’을 인간의 기보에서 배웠는데, 정작 인간이 상상을 초월하는 창의적인 수를 두자 속수무책이었던 거예요. 인간의 창의성, 특히 ‘전혀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시도’는 데이터 기반 AI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취약점이었던 셈입니다. 이세돌은 그 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본 거예요.

딥마인드의 공동 창업자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세돌의 78수는 알파고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AI가 최첨단 기술로 무장하고 있었어도,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만들어 낸 인간의 직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 순간이었죠.

78수가 바둑판 너머 세상에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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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은 그날 경기를 이겼습니다. 최종 시리즈 결과는 4대 1로 알파고의 승리였지만, 그 한 판의 승리가 갖는 의미는 결과를 훌쩍 뛰어넘었어요. ‘신의 한 수(神의 一手)’라는 별명이 붙은 78수는 단순한 바둑 기술이 아니라, AI 연구의 방향 자체를 바꿔놓았습니다. 딥마인드는 이 경험을 토대로 알파고의 후속 버전인 알파고 제로(AlphaGo Zero)와 알파제로(AlphaZero)를 개발했어요. 인간의 기보 데이터 없이 순수하게 자기 자신과의 대국으로만 스스로 진화하는 방식을 채택한 거죠.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AI 역사에 남을 대전환이었습니다.

이세돌은 2019년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AI를 이기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엔 쓸쓸함이 담겨 있었지만, 동시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기사인지를 증명하는 고백이기도 했어요. 완벽에 가까운 AI를 상대로 단 하나의 수로 혼란에 빠뜨린 인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세돌 단 한 명뿐이니까요.

78수는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줍니다.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와 고도의 알고리즘이라도, 인간이 만들어 내는 전례 없는 창의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그 AI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힘은 결국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것을요. 이세돌의 그 한 수는 바둑판 위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AI의 역사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