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크리스토퍼 놀란이 자신의 차기작을 발표하는 순간 영화 팬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역시 놀란답다”는 탄성과 함께, “대체 왜 지금 오디세이냐”는 의문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호메로스가 3000년 전 쓴 서사시를, 21세기 가장 복잡한 구조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왜 선택했을까요?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놀란은 지금 오디세이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오디세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우리가 그걸 몰랐을 뿐입니다.
3000년 된 서사시와 현대 최고의 감독, 대체 무슨 관계?
오디세이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닙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기까지 겪는 10년간의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진짜 핵심은 항해도, 괴물도, 마법도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 정체성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요?
놀란의 필모그래피를 처음부터 다시 펼쳐 보면 섬뜩할 정도로 같은 질문들이 반복됩니다. 그는 데뷔작부터 오디세이의 문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배경은 달랐고, 장르도 달랐지만, 그 안에 흐르는 서사의 뼈대는 놀라울 만큼 동일했습니다. 마치 음악가가 동일한 주제 선율을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악기로 변주해온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그 변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겠습니다. 각 작품이 어떻게 오디세이의 특정 챕터를 사전 연습하고 있었는지, 당신은 아마 끝까지 읽으며 “어, 이것도 그랬네”를 연발하게 될 것입니다.
메멘토 — 기억을 잃은 채 집을 찾아가는 오디세우스
3000년 전 이야기와 2000년대 범죄 스릴러의 놀라운 교점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의 섬에 갇혀 자신의 목적을 잊을 뻔합니다. 연꽃 먹는 사람들의 땅에선 부하들이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기억을 지키는 것, 그것이 귀환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이제 2000년에 나온 놀란의 <메멘토>를 떠올려 보세요. 주인공 레너드는 단기 기억 상실증 때문에 10분마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몸에 새긴 문신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메멘토는 그 질문에 대한 놀란의 첫 번째 답안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시간을 역순으로 배치하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구조를 선보였습니다. 오디세이 역시 선형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디세우스가 이야기꾼으로서 자신의 여정을 청중에게 역회상으로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놀란은 메멘토에서 오디세이의 서술 구조 자체를 연습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속임수와 정체성, 오디세우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오디세우스는 힘이 센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꾀와 속임수로 살아남는 영웅입니다.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Nobody)”라고 속이는 장면은 서양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기만의 순간 중 하나입니다. 레너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관객을 속이고,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진실 자체를 뒤집습니다. 정체성의 속임수, 이것이 놀란과 오디세이가 공유하는 첫 번째 유전자입니다.
프레스티지와 인셉션 — 현대판 저승 여행과 이중성의 미로
오디세우스가 저승에 내려간 이유
오디세이 중 가장 섬뜩한 챕터는 단연 저승(하데스) 방문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살아있는 몸으로 죽은 자들의 세계에 들어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을 묻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죽음의 경계를 넘는 것, 그것은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금기입니다. 2006년 <프레스티지>에서 두 마술사는 복제 기계를 이용해 매 공연마다 죽음을 반복합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장치, 그것은 저승 여행의 현대적 변주가 아닐까요?
그리고 <인셉션>이 있습니다. 꿈의 층위를 내려갈수록 현실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가장 깊은 층 ‘림보’는 사실상 살아있는 자가 들어가는 무의식의 저승입니다. 코브는 아내의 기억이 가득한 그 심연에서 올라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웁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저승의 경계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구조, 이건 오디세이의 11번째 노래와 정확히 같은 플롯입니다. 놀란은 여기서 오디세이의 가장 어렵고 위험한 챕터를 무려 영화 한 편으로 예습해버렸습니다.
층위와 미로 — 놀란이 평생 그려온 항해 지도
인셉션의 구조를 처음 본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이야기야”라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꿈 안에 꿈이 있고, 그 안에 또 꿈이 있는 미로 같은 구조 말이죠. 그런데 오디세이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미 그 구조에 익숙합니다. 오디세우스는 하나의 섬에서 다음 섬으로 이동하며 각기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들을 통과합니다. 각 세계는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여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놀란은 바로 이 ‘세계 안의 세계’ 구조를 인셉션에서 실험하고, 마침내 오디세이에서 완성하려는 것입니다.
인터스텔라 —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의 원형
딸에게 돌아가려는 쿠퍼, 아들에게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
놀란의 필모그래피 중 오디세이와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작품을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인터스텔라>를 선택할 것입니다. 우주 저편으로 떠난 아버지가 가족에게 돌아오기 위해 블랙홀의 경계를 넘는 이야기. 오디세이의 핵심 플롯을 달력에 적어 놓는다면 딱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들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10년 동안 알 수 없는 세계를 헤쳐나가는 아버지의 이야기.” 쿠퍼와 오디세우스는 이름만 다른 같은 사람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시간의 왜곡입니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특수한 행성에서 보낸 몇 시간은 지구의 수십 년에 해당합니다. 오디세우스 역시 신들의 섬에서 7년을 보내는 동안 이타카에서는 아들 텔레마코스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공간을 통과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어긋나는 이야기. 놀란은 인터스텔라에서 오디세이의 시간 감각을 과학적으로 번역해냈습니다. 이것은 오마주가 아니라 예행연습이었습니다.
비선형 서사 — 놀란이 평생 갈고닦아온 호메로스의 기법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인류 최초의 비선형 서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의 여정 한가운데서 시작되고, 과거는 오디세우스 자신의 입을 통해 회상으로 전달되며, 현재와 과거가 교차합니다. 메멘토(역순 구조), 다크 나이트(복수의 시점), 던케르크(세 개의 시간축 동시 진행), 테넷(시간 역행). 놀란의 모든 영화는 비선형 서사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실험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험의 원본 교재는 처음부터 오디세이였던 것입니다.
오펜하이머까지 — 귀환한 영웅이 맞닥뜨린 심판
오디세이의 결말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에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따뜻한 환영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노리는 구혼자들과 치열한 싸움입니다. 귀환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련의 시작입니다. 이 구조, 어디서 봤나요? 바로 <오펜하이머>입니다. 원자폭탄을 완성한 뒤 “세상의 파괴자”가 된 오펜하이머는 영웅으로 귀환하는 대신 청문회장이라는 전장에서 자신의 과거를 심판받습니다. 귀환 후 맞이하는 심판, 이것이 오디세이의 후반부이자 오펜하이머 전체의 구조입니다.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만들면서 이 ‘귀환 후 심판’의 서사를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이제 오디세이에서 그는 이 모든 조각들을 하나로 꿰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메멘토에서 기억의 문법을 익히고, 인셉션에서 저승을 건너는 법을 배우고, 인터스텔라에서 시간의 왜곡을 시험하고, 오펜하이머에서 귀환 후의 심판을 연습한 감독이 이제 원전을 펼쳐 드는 것입니다.
40년간의 여정이 마침내 한 편의 영화로
놀란이 어린 시절 처음 오디세이를 읽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수천 년을 버텨온 이 이야기가 소년의 마음속에 씨앗을 심었고, 그 씨앗은 메멘토라는 첫 싹을 틔운 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왔습니다. 이제 그 나무가 마침내 오디세이라는 이름의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놀란 본인이 “내 모든 전작은 오디세이를 위한 준비였다”고 선언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술가의 무의식은 때로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일관되게 움직입니다. 마치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섬을 돌아다니면서도 결국 이타카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방랑처럼 보였던 여정이 사실은 정교한 귀환 경로였던 것, 그것이 오디세이의 역설이자 놀란 필모그래피의 역설입니다.
놀란의 오디세이가 개봉하는 날, 우리는 새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난 25년간 그가 보여준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의 완성된 서사로 수렴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는 그 순간, “아, 처음부터 이 영화였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에 돌아온 것처럼, 놀란도 마침내 자신의 이타카에 닿는 것입니다.